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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 방랑시인 김삿갓 ③ 어느새 백발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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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삿갓은 술이 거나하게 취해 오자, 수안댁 생각이 새삼스럽게 간절해졌다.
"여보게 주모!"
"왜 그러세요?"
"나, 술 좀 더 갖다 주게."
"그렇게 많이 드셔도 괜찮으시겠어요?"
"술값 못 받을까봐 걱정이 되나?"
"엉뚱한 오해는 마세요. 술값 못 받을까봐 손님에게 술 안드리도록 쩨쩨한 여자는 아니에요."
주모가 술을 갖다 주자 김삿갓은 연달아 술을 마셔댔다. 깨끗이 잊으려고 마음을 굳힐수록 수안댁에 대한 슬픔이 새삼스럽게 가슴을 파고들었기 때문이다.
"손님은 웬 술을 그렇게도 잡수세요. 사람이 술을 마시는 것이 아니라, 마치 술이 사람을 마시는 것만 같네요."
주모는 김삿갓의 술 마시는 모습을 보고 뼈 있는 질책을 했다. 그러자 김삿갓은 취중에 자신의 마음을 드러내는 말을 하게 되었다.
"나는 며칠 전에 마누라가 죽었다네, 그러니 어찌 시름이 없을 수 있겠나."
그러자 주모는 술을 한 잔 따라주며 시큰둥한 어조로 이렇게 말을 한다.
"지나간 일은 깨끗이 잊어버리고 술이나 드세요. 마누라가 죽었거든 새 장가를 들면 될 게 아니오. 나는 몇 해 전에 외아들이 죽었다오. 아무리 슬픈 일을 당해도 산 사람은 결국에 살게 마련입디다."
주모는 무심코 지껄인 말인지 모른다.
그러나 김삿갓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그렇다! 인생은 현재와 미래는 있어도, 과거에 연연해서는 안 될 것이다. 그러므로 과거는 깨끗이 잊어야 하는 것이다.)
주막 '야몽'의 주모는 마치, 해탈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처럼, 지나간 일에 구애되지 않고, 마치 흘러가는 물처럼 자연스럽게 살아가는 모습으로 보이는 것에 김삿갓은 크게 감동하였다. 그리하여 김삿갓은 술을 마시다 말고 ,그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주모에게 큰절을 올리며 이렇게 말했다.
"길상천녀(吉祥天女: 佛家에서 이르는 남에게 덕을 베풀어 주는 仙女)께서,
어리석은 나에게 많은 것을 가르켜 주셔서 고맙습니다."
술이 취한 데서 오는 일종의 환각이었음은 말할 것도 없었다. 주모가 소리를 내어 웃으며 말한다.
"호호호, 손님은 이만저만 취하지 않으셨군요. 나를 돌아가신 마나님인 줄로 알고 계시는 게 아니오?"
"아, 아니올시다. 길상천녀 덕분에 죽은 마누라를 깨끗이 잊어버리게 되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입니까."
"쓸데없는 시름을 잊어버리게 되었다니 다행입니다. 몹시 취하신 모양이니, 한잠 주무시도록 하세요."
주모가 목침을 내밀어 주어, 김삿갓은 그 자리에 쓰러지기가 무섭게 잠이 들어 버렸다. 이렇게 정신없이 자고 나서 깨어 보니 마루에는 아침 햇살이 환히 비치고 있는데, 주모는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주모는 어디로 갔을까?
나는 어제부터 지금까지 한바탕 꿈을 꾸고 있었단 말인가?)
"야몽"이라는 주막 이름이 어쩐지 우연한 이름이 아닌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주모가 보이지 않기에 , 김삿갓은 술값을 넉넉히 놓아두고 길을 떠났다. 산길을 내려오노라니, 마침 길가에 옹달샘이 있었다. 목이 컬컬하던 김삿갓은 두 손으로 샘물을 움켜 받아 한바탕 마셨다.
그러고 나서 물속을 들여다보니, 물위에는 김삿갓 자신의 얼굴이 비쳐 보이는 것이 아닌가. 김삿갓은 자기 얼굴을 새삼스럽게 들여다 보았다. 몇 해 전만 해도 머리가 새까맣었는데, 불과 2, 3년 사이에 백발이 성성해진 데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어허 ! 검은 머리는 어디 가고 어느새 백발이 되었구나!)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물위에 비친 자신을 마주 보며 다음과 같은 시를 한 수 읊었다.

白髮汝非金進士(백발여비김진사)
머리가 허연 너는 김진사가 아니냐

我亦靑春如玉人(아역청춘여옥인)
나도 한때는 꽃다운 청춘이었다

酒量漸大黃金盡(주량점대황금진)
술은 늘어만 가는데 돈은 떨어져

世事纔知白髮新(세사재지백발신)
세상을 알 만하자 백발이 되었구나.


- 필자 김옥균은 MBC PD 은퇴하고 글 쓰는 일에 전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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